정치

[알고싶어서] 이스라엘 공습, 뿌리깊은 분쟁의 역사

광화문짬뽕 2008. 12. 29. 18:34

김애화 한국진보연대 국제연대위원장

 

* 이스라엘의 연속된 가자 지구 폭격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인 300여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부상을 입는 등 41년 만에 최대 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김애화 한국진보연대 국제연대위원장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사'에 관한 기고를 보내왔다. 김애화 위원장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침략은 수세기 동안의 역사중 가장 비도덕적인 것임을 알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편집자주

이스라엘 국가 건설 과정

팔레스타인 땅과 시오니즘: 19세기 팔레스타인 땅에는 다민족이 거주했다. 약 86%는 무슬림이었고 10%가 기독교, 4%가 유대교 인구였던 이들은 평화롭게 살았다.

1800년대 후반 유럽에서 '시오니스타'로 알려진 그룹이 이 땅을 식민지화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소수의 극단주의자 그룹이었다. 이들은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고자 했고, 팔레스타인을 장소로 결정하기 전에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들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이들의 이주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시오니스타가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 하고, 유대국가를 위한 땅을 가지려는 희망을 공공연하게 피력하면서 원주민들의 경계심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결국 분쟁이 발생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나치스의 포악이 극에 달했고, 서구사회 시오니스타의 활동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망명이 거부되자,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하는 유대인 숫자가 급증하는 한편 분쟁도 증가했다.

UN 분리정책: 결국 1947년 유엔이 개입하게 됐다. 하지만 유엔은 민주적인 원칙보다 중세적인 전략으로 선회하는 방식을 택다. 중세전략에 따르면 외부세력이 힘으로 타민족의 영토를 분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오니스타의 압력에 의해, 유대인들은 전체 인구의 30%, 영토의 7%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55%를 유대인국가에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가자지구 공습
  •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으로 3백여명이 사망했고 8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알자지라 캡처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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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949 전쟁: 이러한 유엔의 권고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5개의 아랍국가가 전쟁에 참가했다. 이 당시 시오니스타군은 모든 아랍국과 팔레스타인을 합산한 것과 전투력아 3:2 수준으로 훨씬 월등한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아랍군은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다. 전투는 팔레스타인 영토로 지정된 곳에서 일어났다.

또 아랍군은 시오니스타 군에 의해서 16번의 학살이 저질러진 후에 전쟁에 참가했다. 이 대량학살 중 하나인 데이르 야신 지역 학살에서는 100 명 이상의 여성, 아동, 남성이 사망했다. 이후 이스라엘 수상이 된 메나헤김 베긴은 바로 대량학살의 주범인 유대테러리스트 그룹 대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량학살을 "훌륭한 점령 작전"이었다고 평가했다. “데이르 야신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는 적을 공격할 것이다. 신은 점령을 위해 우리를 선택했다. ”

시오니스타/이스라엘군은 모두 합쳐서 33번의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1978년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은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난민과 가자·서안 지구 점령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평화상 수상의 명분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점령했다. 100만 팔레스타인 인구 중 3/4은 난민이 되었고, 500개 이상의 마을이 파괴됐다. 지도가 새롭게 만들어졌고 모든 도시, 강, 언덕이 히브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화를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수십년 동안 이스라엘은 이들의 존재를 무시해왔다. 전 수상 골다 메이르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은 없다."

1967년, 6일 전쟁: 1967년 이스라엘은 공격을 통해 추가로 많은 영토를 점령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에 고강도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은 6일 동안 진행됐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추가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22 %를 점령했다. 1948년 공습에서 피해있었던 서안과 가자지구였다.
국제법에 따르면 전쟁으로 영토를 획득하는 것은 승인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점령지이고 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이외에도 이집트와 시리아 영토 중 일부를 점령했다. (이후 이집트 영토는 반환했고 시리아 영토는 아직 점령지로 남아있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을 겪으면서 이전보다 무려 3배 가까이 확대됐다.

2005년 이후: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철수했지만,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다시 가자지구 봉쇄를 시작했다. 이후 유혈분쟁이 계속되다가 이집트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올해 6월 6개월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봉쇄를 계속했다.

2008년 12월 19일: 6개월 간의 휴전이 끝난 날은 12월 19일. 직후 이스라엘은 공급을 단행했고 이는 1967년 '6일 전쟁'을 통해 이곳을 점령한 이후 최대 규모의 공격으로 기록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저항의 역사

현재 분쟁에서 핵심 이슈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인종 차별이다. 현재 이스라엘 영토의 원래 주민은 96%가 무슬림과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이들 무슬림, 기독교 난민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둘째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거주민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다. 93년 오슬로 평화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국가가 되어야 했다.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서안,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은 국가, 시민권, 생명에 대한 권리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정복한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점령 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일부 지역을 교육, 의료 등에서 자치를 보장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으로 허용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법에 따르면 ‘점령군’은 통제 하의 시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의무를 무시해왔다.

이스라엘군은 일상적으로 민간 토지를 수용한다. 적절한 절차 없이 아동을 포함한 시민들을 구속한다. 또 투옥된 상태에서 이들을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가족의 집을 파괴하는가 하면, 농작물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야간 통행금지를 시킨다. 상점을 파괴하고 시민을 죽이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밤중에 무장 군인에 의해 안동이 구속되면 가족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경찰서로 가면 군인들에 의해 구타당할 가능성이 높고 다양한 육체적 고문, 격리수용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녀를 보호할 능력이 이들에겐 없다. 이들은 종종 자녀를 면회조차 할 수 없다. 몇년, 몇십년 형을 언도할 군사재판이 진행중이어도,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변호사를 고용해 기껏 몇 개월 기간을 줄이는 것뿐이다.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팔레스타인 거주지역 주변에 분리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또 경비 초소를 설치해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하는 것도 막고 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농작물도 수확하지 못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며, 환자가 병원에 갈 수도 없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스라엘 경비대가 허락하지 않으면 가자지역, 서안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또 경비대의 허락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통해 이들을 지역에서 내쫓으려 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계속되고 있다. 선거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선거 기간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후보자를 구속, 격리시킨다. 이러한 사건은 서구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3차 인티파타 선언
  • 시리아에 망명해 활동 중인 하마스 최고 지도자 칼리드 미샤알은 가자지구에서 최대의 참사가 일어난 12월 28일 "시온주의 적에 대항한 제 3차 인티파타"를 선언했다. (알자지라 캡처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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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티파타: 이 용어는 아랍어로 항쟁, 저항을 뜻한다. 글자 그대로 하면 “털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1차 인티파타’는 1986년 시작돼 오슬로 평화협정까지 이어졌다. 이때 아주 소수만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군데 돌을 던졌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의 7-10배 이상 사망했다. 이러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돌을 던진 사람의 팔을 부러뜨리는’ 정책까지 이용됐다. ‘뼈를 부러뜨리는’ 정책이 시행된 첫날에만 가자지역 한 병원에 200명이 골절손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2차 인티파타’는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촉발됐다. 이스라엘 아리엘 샤론 장군은 수천 명의 무장 이스라엘군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했고, 몇 명의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그에게 돌을 던졌다. 이스라엘군은 바로 총을 쏘았고 이로 인해 철날 5명, 둘째날 10명이 사살됐다.

이로 인해 촉발된 항쟁은 수년 간 지속됐다. 이스라엘은 주기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탱크, 헬리콥터, F-16전투기, 로켓을 사용해 집단 침입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무력에 저항하기 위해 자살공격을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다수가 이러한 자살 폭탄에 반대했지만 무장 저항이 필요하다는 데는 대다수 공감했다. 시리아에 망명해 활동 중인 하마스 최고 지도자 칼리드 미샤알은 가자지구에서 최대의 참사가 일어난 12월 28일 "시온주의 적에 대항한 제 3차 인티파타"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