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산악인, 목숨을 건 10개의 서바이벌 스토리
세기의 산악인, 목숨을 건 10개의 서바이벌 스토리
작가이자 등산가인 에드워드 더글라스(Ed Douglas)가 고른 세기의 서바이벌 스토리입니다.
가슴아프지만 감동적이고 놀라운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 책과 영화로 출판되거나 제작되었습니다.
그 만큼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화재를 모았던 세기의 스토리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탐욕과 자연에 대한 무모한 도전의 결말이 어떤지 우리들에게 시사해주고 있기도
하고 인간의 도전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각 이야기마다 영화화 되거나 출간 된
책에 대한 정보를 넣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한 번 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 에베레스트 등반의 상업화가 초래한 결말 (Everest, 1996)
에베레스트에서의 기록과 역사 중 특히 최근 10여 년간의 기록들은 현재 에베레스트 등반의 양면성 즉
흑과 백의 논리가 공존하는 이유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10년간 에베레스트는 대다수 산악인이 동경의 대상으로 혹은 경외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세계 최고봉의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동경의 대상지이며 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에베레스트가 등반의 대중화라는 그리고 상업화라는 비판과 함께 발전 아닌 발전을 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중화와 상업화라는 논란속에는 프로젝트등반대(일명 상업등반대)가 중심에 서있습니다.
프로젝트 등반대는 1996년 봄, 에베레스트 등반에서의 비극과 처절한 경험을 그려낸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의 《Into Thin Air》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알려졌습니다.
일급 등산가의 가이드로 다른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작한 크라카우어는 사투 끝에
정상 정복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그들의 자만심과 도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궂은 날씨에 하산을 해야했지만, 정상을 못밟은 사람들은 평생 다시 기회가 없을거라며 산행대장의 하산명령을 뿌리치고 막무가내로 정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순식간의 눈폭풍으로 체감온도는 영하70도 까지 내려가고
평지의 1/3밖에 안되는 산소량으로 대원들은 정신적 착란을 겪으면서 18명이 조난을 당하게 됩니다.
쉰살의 사업가 ‘벡 웨더스’ 산에 미친 청년 ‘앤디 해리스’ 우체국에서 야근근무하며 등반비용을 모은
‘더그 한센’ 등 12명의 등반자가 조난을 당하여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등반대의 일원으로 취재를 위하여 잠입하여 참가한 저널리스트 존 크라카우어가 직접 보고 겪은 상황을 저술한 책이 《Into Thin Air》입니다. 이 책에서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았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다. 현명한 분별에 대한 욕구의 승리.”라고 적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자연에 대한 무모한 도전의 결말이 어떤지 우리들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바가 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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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발 4,000m 안데스에서의 72일 생존기 (Andes, 1972)
1972년 10월 12일 우루과이, 몬떼비데오에서 45명의 승객을 태운 Fairchild 비행기가 칠레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여기에는 젊은 우르과이 럭비팀들이 타고있었습니다.
13일 비행기는 안데스 산맥근처에서 강한 폭풍을 만나면서 휘청거리다가 비행기 날개가 산에
부딪치면서 추락고하고 맙니다. 45명의 승객 중 12명은 이때 즉사하고 말았습니다.나머지 33명은 살아 남아야만 했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망자는 속출했고 불과 10분전만 해도 대화를 나누었던 동료가 싸늘한 시체로 변했습니다.
허기 진 생존자들은 결단의 순간이 왔고 이렇게 굶주려서 모두 다 죽던지, 아니면 집단 자살을 택하던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시체를 먹는 수 밖에 었었습니다. 종교와 윤리적 문제로 의견이 엇갈리지만 시체를 먹기로 했고 생존자들은 구출된 후에도 이 사실을 오랫동안 숨겼습니다. 그들은 결국, 구조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 세 명이 구원요청을 위해 안데스 산맥을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목숨을 건 크나큰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10여일을 걸어 내려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고 1972년 12월 22일 비행기가 추락한지 72일만에 그들은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6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이 인간승리는 그 후 수 많은 책과 두 편의 영화로도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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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베레스트 초등 등반의 미스터리 (Everest, 1924)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탐험대는 정상 바로 아래에서 두 명의 영국인을 잃게 됩니다.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던 영국의 시도가 구름 속에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등반 대장인 멜러리와 그가 등반 파트너로 선택한 20대 초반의 어빈. 이 두 사람은
1924년 6월 7일 해발 8,170m의 2인용 텐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정상 공략을
하러 떠났습니다.
하지만 정상을 240m앞에 두고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이후에 영원히 그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이 정상을 밟았을지, 아니면 그 전에 죽게 되었을 지를 매우
궁금해 했고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이들의 등반은 에드문드 힐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1953)보다 30년이나 빠른 것입니다.
그들이 실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는지 서지 않았는지에 대한 사실여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등정을 했다면 그당시 배낭속에 있던 코닥 카메라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 때문에 말로리, 어빙 수색원정대는 지금도 이 카메라를 수색 하고 있습니다. 말로리와 어빙이 남긴 필름 내용에 따라 에베레스트 초등 정사를 다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공식 기록은 1953년 5월 29일 11시 30분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가 초등의 영예를 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4.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시울라 그란데 (Siula Grande, 1991)
단순히 끈은 묶는다는 의미 이상, 즉 위험방지, 안전을 위한 수단이며 자일을 묶는 상대방을 무한적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991년 영국인 등반가인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는 페루 안데스 산맥 시울라 그란데(6400m)
등반하다 하산도중 다리가 부러져 낙오했던 조 심슨이 혼자 힘으로 베이스캠프로 처절한
고투끝에 살아 돌아옵니다. 이 이야기는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최근엔 "난, 꼭 살아 돌아간다"로 다시 나옴)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터칭 더 보이드" 라는 다큐멘터리영화로도 개봉되었습니다.
혼자 낙오되어 무릎이 완전히 박살나고 뼈까지 드러난 상태에서 조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떨어진
크레바스를 뚫고 올라와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베이스캠프까지 72시간동안의 사투 끝에 나눈 두 친구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사이먼, 넌 난 살린거야. 알아? 너한테는 그 밤이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난 널 비난하지 않아.
달리 방법이 없었어. 나는 그걸 이해하고, 왜 너는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알고 있어.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날 능선에서 내려줘서 고마워"
"솔직히 말해 난 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난 확신했어. 네가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
"이젠 됐어.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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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프스 3대북벽 노스페이스 '아이거'등반 (Eiger, 1936)
노스페이스는 마테호른, 그랑드조라스와 함께 알프스의 3대 북변인 아이거 북벽을 일컫는 말입니다.
클라이머의 공동묘지라고 불리울 정도로 등반 역사상 사망자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조난 사건이 많아 등산금지령까지 내린 경우도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해발은 3,970m밖에 안 되지만 수직에 가까운 1,800m 절벽이 만년설에 뒤덮여 있는 난코스이기
때문입니다. 1936년 아이거북벽을 토니 쿠르츠와 안디 힌테슈토이저라는 두 사람이 초등 등정에
도전합니다. 최초 등반이 1938년이었으니 이들이 등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유명한 이유는 1938년 최초 등반한 독일-오스트리아 합동대가 등반한 코스가
토니 쿠르츠와 안디 힌테슈토이저가 등반한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의해 단 한 번도 정복당한 적이 없는 아이거 북벽을 정복하기 위한 등반 코스를 개발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안디 힌테슈토이저는 토니 쿠르츠의 친구로 1936년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다 목숨을 잃습니다. 이 이야기를 영화한 것이 <노스페이스>인데요. 영화에서는 안디 힌테슈토이저가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로프를 끊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추락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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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국 제3차 K2등반대의 등반기 (K2, 1953)
세계 제2의 고봉 K2(8,611m), 1953년 찰스 휴스턴은 미국 제3차 K2등반대를 이끌게 됩니다.
등반대는 스카르두에 집결해 포터들을 선발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이 해발 5,029m 지점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K2남동릉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능선 상에 두서나 동의 텐트를 설치할 캠프지를 찾아내기가 수월하지 않은 곳입니다. 게다가 7월 10일 밤 사나운 폭풍이 그들을 강태해 눈보라가
텐트 속까지 파고들었고 다음날 해가 뜨자 폭풍설은 그쳤지만 눈이 덮인 암벽은 등반이 더 어렵고 위험해졌습니다.
등반대가 고도를 높일수록 지세가 더욱 험난해졌고 추위와 강풍이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산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그들은 폭풍에 갖혔고 그 와중에 한 명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남은 등반대원 모두가 거의 죽을 수 있는 상황에 까지 몰렸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놀라운 솜씨로 확보해 5명의 추락을 막은 쇼닝 대원은 K2에서 영웅이 되어 귀국했고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비극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난 1993년에 K2의 베이스캠프 상부 빙하에서 아트 킬키의 유해 일부가 옷 조각과 함께 발견되어 미국의 유족에게 인계되었다고 합니다.
7. 소련의 여성산악인들의 슬픈등반사, 파미르 (Pamirs, 1974)
1974년 8월 5일 소련의 딸들인 여성팀은 레닌피크를 종주, 횡단한다는 목표로 북동 루트를 통해 오후 5시경
정상에 섭니다. 하지만 당시 이미 기상조건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함께 갔던 스코틀랜드팀이 대규모의 폭풍이 시작되는 것 같으니 같이 하산하자는 제의를 소련 여성대 8명의 대장인 엘비라 샤트예바가 거절합니다. 다음날 간밤에 불어 댄 바람으로 한 사람이 무너진 텐트에 깔리면서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무전으로 전해졌지만 구조팀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오후 5시에 다시 연결되었을 때에는 ‘정상 바로 아래 북동 릿지로 비박지를 옮기던 중 다른 대원을 확보해 주던 대원 한명이 그대로 얼어 죽었으며, 환자도 한명이 더 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8시 30분 다시 무전기가 연결되었고 또 두명이 죽고 텐트 한동이 바람에 산산히 조각나 버렸으며
다섯명이 들어있는 마지막 텐트도 가파른 릿지를 파내고 깎아서 가까스로 만든 선반위에 걸쳐져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 몇 번이 무전연락속에서 한 사람 씩 죽어갔고 8시 30분 다시 연결이 되었을 때 ‘이제 둘뿐예요. 우리 두 사람도.. 이러다 곧 죽어가겠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노력해 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발 용서하세요. 사랑합니다, 여러분.. 안녕…” 짤깍, 이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마지막 무전을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파미르, 폭풍과 슬픔》이라는 책을 통해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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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산 중의 왕 마테호른 (Matterhorn, 1865)
알프스산맥에는 수 많은 산봉우리들이 있습니다. 그 중 단연 스위스의 마테호른이 ‘산 중의 왕’이라 불립니다. 단지 그 높이가 4,478m의 고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은 아닙니다. 카리스마적인 존재감과 흠잡을데 없는 산의 형상, 마치 코뿔소의 뿔 모양으로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모습. 때때로 안개속에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나타나는 우뚝 솟은 봉우리는 아마 마테호른을 본 사람은 왜 ‘산중의 산’인지 그 답을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1865년 7월. 영국인 에드워드 윔퍼와 그의 동료들이 처음으로 험난한 마테호른봉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하산도중 7명의 팀원 중 4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전 세계 산악계에 급속히 타전되었고 이를 계기로 마테호른은 더욱 매력적이고, 신비한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9. 아시아의 거벽 하라모시 (Haramosh, 1957)
![]() Diran Peak by NotMicroButSoft (Back in town) ![]() ![]() ![]() |
파키스탄의 발티스탄 지방과 길기트 지방과의 경계에 있는 산, 소 카라코람 하라무쉬산맥에 있습니다.
1957년 영국 옥스포드대학팀이 북면의 쿠트와르 골짜기로 들어가 마니 빙하와 하라 모쉬 라를 거쳐 마니 피크 동북릉 바로 밑까지 갔지만 대원 2명을 잃고 후퇴했습니다. 1958년에는 오스트리아대가 영국대가 뚫은 루트로 12시간 반의 고투끝에 초등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57년에 조난한 영국 대원을 위한 십자가를 산정에 남기고 하산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라스트 블루 마운틴(The Last blue mountain)》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10. 죽음을 부르는 산 (K2, 2008)
2008년 11명의 등산가들이 K2정상을 얼마 남기지 않고 사망했습니다. 8월 1일 정상공격을 나섰던 8개국
18명의 등반가들 중 11명이 사망한 것입니다.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던 중 보틀넥의 거대한 세락이
붕괴되면서 5명은 함께 추락했고 4명은 고립되어 위태롭게 하산하다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2명은 그보다 먼저 정상공격 중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3명의 우리나라 등반가도 포함되어
국내에도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설적인 등반가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는 상업적인 압력이 이러한 불상사를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는 K2의 별명에 맞게 이 산에서의 사망자/등정자 비율은 현재 26%에 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