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옛사진들(백년의 여정)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특별기획전으로 한말, 일제강점기 시절의 화성 관련 사진전을 열고 있습니다. 사진전의 이름은 '백년의 여정'입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정조의 꿈이 서린 화성은 동서양 성곽의 장점을 모아 만든 성곽의 꽃으로 179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후 부침을 거듭하고 특히 한국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원형을 잃었습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조선총독부와 학술조사자들이 찍은 것으로 화성의 원형과 변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화성뿐만 아니라 행궁과 수원의 엣 모습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진자료들이라 생각합니다.
유리건판으로 찍은 화서문
화서문밖 너른들판(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문으로 서북공심돈과 연결되어 있다. 화서문밖으로 대유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수원백성을 살찌웠다고 한다.
장안문 안 모습(헤르만 산더,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서장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달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서장대는 화성의 총지휘소로 정조가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화재로 불타기 이전 원형의 모습이다.
포사가 사라진 서남암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암문은 성곽의 후미진 곳에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문이다. 서남암문은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가 있으나 사진 속에는 사라지고 없다. 현재는 포사를 복원해 놓았다.
지붕이 사라진 남포루(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달문 안 풍경(1910년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팔달문 홍예를 통해 전기가 성내로 들어온다. 우측으로 수원 관련 엽서를 발행했던 청광당 서점이 보인다.
전기줄에 둘러싸인 팔달문(1920년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화성의 남쪽문으로 사통팔달 통한다는 의미를 지닌 팔달문, 성밖은 물론 옹성 안까지 전봇대가 세워지고 전깃줄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성 안에서 본 봉돈(일제강점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봉돈은 불과 연기를 피우는 돈대로 화성 행궁 정면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화성에 벽돌로 봉돈을 쌓았다.
성 밖에서 본 남수문(헤르만 산더,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남수문은 성안으로 흘러들어온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자 남쪽에서 침입해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현재 복원이 안되어있다.
남공심돈 주변(헤르만 산더,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일제는 수원시가지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1926년부터 1927년까지 팔달문에서 남수문까지의 모든 시설물을 허물었다. 남공심돈 주변이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창룡문 안(일제강점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창룡문은 화성의 동쪽 문으로 화서문과 규모가 같다.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옹성 출입구가 한 쪽에 치우쳐 있다. 창룡문 안팎으로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동북공심돈(일제 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심돈은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3개의 공심돈이 있었다. 성곽 안쪽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모습이 정겹다.
동장대(일제 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무대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동장대는 군사훈련을 하는 곳이다. 높은 석축 기단 위에 네모반듯한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방화수류정(1910-1920,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화홍문과 방화수류정(1932년 이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말라버린 수원천이 애타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말라버린 냇가에는 두 아이가 정겹게 소꼽놀이를 하고 있다.
화홍문 앞 빨래터(1910년-1920년대 초,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은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으로 손꼽히지만 비상시에는 군사시설의 역할을 했다. 화홍문 앞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북동포루(일제 강점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포루는 성벽의 돌출된 치성 위에 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설치한 누각이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몸을 숨긴 채 포를 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다.
장안문 앞 풍경(1910년대 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안문(1910년대 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포식의 화려한 공포가 장안문의 위용을 더한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에 다포식 공포를 사용하였다.
화성의 정문 장안문(1920년대-1930년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장안문은 화성의 북쪽문으로 서울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는 정문이다. 화성의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누각에 우진각 지붕으로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화성행궁은 정궁과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이후 화성행궁의 시련도 시작되었다. 화성행궁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 낙남헌인데, 우습게도 일제강점기에 수원군청으로 쓰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머니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던 봉수당에는 의료시설이 자헤의원이 들어서고, 장용영 군사들이 거처하던 북군영에는 수원경찰서가 들어섰다. 화성유수부의 군무를 맡아보던 이아는 경성지방법원으로 쓰였고, 화성유수부의 객사 우화관 자리에는 수원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다. 아래에는 화성행궁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헤르만 산더, 1907,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신풍루와 좌익문(서양인이 본 꼬레아)
자혜의원으로 쓰인 봉수당(1914년, 발전하는 수원)
봉수당 자리에 들어선 경기도립병원(조선총독부, 1929년, 생활생태조사 수원군)
수원군청으로 쓰인 낙남헌(조선총독부, 1929년, 생활생태조사 수원군)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쓰인 이아(사진엽서, 개인소장)
수원공립보통학교로 쓰인 우화관(1915년, 화성의 그림자)
정조의 어진 봉안처 화령전(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본군이 차지한 화령전(사진엽서, 개인소장)
사도세자가 잠든 융릉(사진엽서, 수원박물관 소장)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수원은 많은 변화를 겪게된다. 경부선의 수원역이 들어서면서 수원역과 팔달문 사이에 '신작로'가 생긴다. 1914년에는 수원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들판과 거리는 물론 성곽 위에도 전봇대가 세워진다. 또 초가들이 사라지고 양철지붕이 늘어갔으며, 도로변 가게들은 일본어 간판의 상점들로 대체된다. 아래 사진을은 근대화의 물결이 출렁이던 수원의 변화상들이다.
장안문 안 민가(1920년대 이전,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성내 모습(헤르만 산더,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수원향교에서 수원역을 바라보며(헤르만 산더,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수원향교에서 수원역을 바라보며
팔달문에서 장안문을 바라보며
팔달문에서 장안문을 바라보며
팔달문에서 장안문을 바라보며
팔달문 안 모습
초가가 즐비한 팔달문 밖(1905년 이전, 수원박물관 소장)
팔달문 박(1905년, 꼬레아 꼬레아나)
양철지붕이 등장하는 팔달문 밖(1910년-1920년대, 개인소장)
팔달문 밖 은단가게(노베르트 베버, 1923년)
팔달문 밖 풍경(사진엽서, 수원박물관 소장)
팔달문 옹성 안 전봇대(1920년대, 개인소장)
전깃줄에 둘러싸인 팔달문(1920년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옹성 철거작업을 위해 전깃줄이 사라진 팔달문(1920년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넓혀진 팔달문 옹성(사진엽서, 수원박물관 소장)
팔달문 안 풍경(사진 엽서, 개인소장)
팔달문 시장 풍경(조선총독부, 1929년, 생활생태조사 수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