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낚시

아이거 북벽에 얽힌 이야기

광화문짬뽕 2011. 3. 5. 10:19

출처 : http://blog.daum.net/withya/5961016

2008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 내사랑 아이거를 뒤늦게 보게 되었다. 잔잔하면서도 웅장한 영상미와 감동을 느낄수 있는 영화였다. 갑자기 아이거 북벽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해진다..... ^^

 

 

 아이거 북벽(3,970m)은 낮은 고도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8,126m), 안데스의 아콩가구아 남벽(6,959m)과 더불어 지구 상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3대 벽으로 꼽힌다. 숱한 사망자가 속출해 '클라이머들의 공동묘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아이거 북벽에서의 숱한 죽음들

 

초등정 이후 아이거 북벽에서 동계·단독등반, 직등(Direttissima)이라는 극적인 과제가 해결되는 1966년까지 무려 27명이라는 귀중한 목숨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아이거 북벽 최초의 희생자는 독일의 막스 세들마이어(Max Sedlmayer)와 칼메링거(Karlmenringer)다.
이들은 1935년 8월 이 벽의 초등을 노리고 등반에 나섰으나, 폭풍우와 강풍, 낙뢰를 동반한 악천후 속에서 등반하던 중에 탈진 사망한다. 2주 뒤 위험을 무릅쓰고 벽쪽으로 20m 가까이 접근한 정찰 비행기에 의해 눈 속에 앉은 자세로 반쯤 파묻힌(3360m 지점) 칼메링거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 첫 조난이 발생한 지점을 ‘죽음의 비박(Todes Biwak)’이라 부르고 있다.
막스 세들마이어의 시체는 다음해 여름, 동생 하인리히와 그의 파트너들에 의해 발견된다.

눈 위에 삐져나온 손가락을 발견하고 그 주위를 파헤쳐 시체 발굴에 성공한다.

이들은 시체의 팔과 다리를 잘라 큰 자루 안에 담아서 하강한다.
칼 메링거의 시체는 27년이 지난 1962년 여름, 스위스 등반대에 의해 완전히 건조된 채 발견된다.

그의 시체는 눈사태에 휩쓸린 듯 최초의 조난 지점 훨씬 아래 부분인 ‘제2설원’에 있었다.
첫 희생이 발생한 다음 해 독일의 힌터슈토이서(Ander Hinterstoisser), 토니 쿠르츠(Toni Kurz), 라이너(Rainer), 빌리 앙거리(Willy Angerer) 등 네 사람이 사망한다.

이들은 등반 중에 앙거리가 머리에 낙석을 맞아 부상을 입자 올라온 길로 거꾸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얼어붙은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이곳은 80도 경사의 절벽으로 일단 트래버스 하면 돌아갈 수 없는 지점으로 이들의 조난 이후 희생자인 힌터슈터이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들은 트래버스에 실패하자 200여m 아래 직벽으로 하강을 시도했으나 쿠르츠만 제외하고 3명 모두가 추락사한다.

쿠르츠는 로프 끝에 매달린 채 밤을 지샌다. 구조대는 그가 매달려 있는 80미터 지점까지 접근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구조대는 이 벽의 중간에 뚫려 있는 기차 갱도 창문을 이용하여 여분의 로프와 장비를 쿠르츠가 내려보낸 로프에 연결해 올려보낸다.

쿠르츠는 구조대가 전해준 여분의 로프를 연결 필사의 탈출을 시도해 구조대가 있는 5미터 지점까지 접근한다.

그러나 로프를 연결한 매듭에 하강용 카라비너가 끼어 더 이상 오도가도 못한 채 구조대의 눈앞에서 탈진하여 사망하고 만다.
불과 5미터의 거리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아득한 경계가 된 셈이다.

구조대는 긴 막대에 칼을 묶고 로프를 끊어서 북벽 아래로 쿠르츠를 떨어뜨려 그의 시신을 회수한다.
이 사고로 인해 아이거 북벽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 높아졌으며, 마침내 여론에 밀린 스위스 정부는 아이거 등반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이 벽에서는 수많은 죽음이 이어졌다.
1957년 8월에는 아이거 북벽에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탈리아 스테파니 롱히(Stefano Longhi)와 코르티(Corti), 독일의 귄터(Gunter)와 마이어(Mayer) 팀이 북벽에서 합류하여 등반을 한다.

이들이 ‘하얀 거미(Weisse Spinne)’에 도착했을 때쯤 롱히가 오버행 밑으로 추락한다.

하얀 거미는 이 벽의 3분의 2 지점에 놓여 있는 120여m 길이의 설원으로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낙석과 눈들이 합쳐져 있는 거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아이거 북벽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롱히의 동료들은 로프에 매달린 그를 아래 테라스에 내려서게 한 뒤 구조를 기다리게 했다.

나머지 독일 대원 2명은 정상을 향해 등반을 계속하여 자정이 넘은 시간 정상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으며 4년 후 남서능 쪽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코르티는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렇다면 추락한 채 남겨진 롱히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날 알프스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리오넬 테레이와 카신 등 50여 명이 구조대로 출동하여 정상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악천후로 구조가 연기되었다. 이날 밤 많은 폭설이 내렸다.

구조대는 그가 추위에 얼어죽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철수하였다.
그후 롱히의 시체는 처음 자리에서 미끄러져 약 5m 아래 허공에 2년 동안 대롱대롱 매달린 채 클라이네 샤이테크 마을에 몰려오는 관광객들의 망원경 속의 구경거리로 방치되었다.

그의 시체는 사건 발생 2년이 지난 1959년 6월 정상으로부터 케이블을 설치하고 하강한 스위스 구조대에 의해 회수된다.
검시 결과 롱히는 사망 전 머물고 있던 스탠스에서 강풍에 날려 떨어지면서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줄에 매달린 채 추위와 기아의 고통 속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하나 세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1966년 3월 아이거 북벽에서 등반 중에 로프가 끊어져 추락한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이거 북벽에서 최초로 시도된 디렛티시마(Direttissima·직등)는 네 명의 영·미 합동 팀과 독일 팀 여덟 명이 같은 루트를 놓고 경합을 벌였다.

결국 이들 두 팀은 합동 등반을 협의한 후 같은 루트로 디렛티시마를 시도한다.

영·미 합동 팀에는 미국의 존 할린(John Harlin)과 영국의 레이튼 코어(Layton Kor), 듀갈 하스톤(Dougal Haston), 크리스 보닝턴(Chris Bonington)과 같은 당대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로 조직되었다.

독일대는 귄터 외 7명이었다.
이 등반에서 존 할린은 주마링을 하던 도중 고정 로프가 끊어져 천길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망한다.

그가 사용한 로프는 왜 끊어졌을까.

코어와 보닝턴은 직등 루트 성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중앙 필라를 올라 하얀 거미의 발끝에 접근한다.

이때 존 할린과 하스톤은 죽음의 비박지를 출발, 하얀 거미로 향하는 중앙 필라의 고정 로프를 주마링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같은 시각 아래쪽에 있던 독일의 롤프(Rolf)가 하얀 거미로 오르려 하고 있을 때 알 수 없는 붉은 물체가 그의 옆을 스치면서 북벽 아래로 쏜살같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한편 클라이네 샤이테크에서 이들의 등반상황을 지켜보던 한 취재기자가 중앙 필라 쪽에서 빨간 물체가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등반 중이던 독일 팀의 롤란드(Roland)는 무전으로 이 상황을 전해듣고 존 할린의 생사를 살피려고 하강한다.

그는 하얀 거미의 두 피치 아래 버트레스 꼭대기 40여 미터 위에서 잘려진 로프를 발견한다.
로프가 고정된 바로 밑 예리한 암각 모서리에 쓸려 끊어져 있었다.

앞서 네 사람이 같은 로프를 사용해 올라갔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으나 마지막 다섯 번째 등반자 존 할린이 오를 때 끊어지고 만 것이다.

운명의 신은 다섯번째 존 할린을 끝내 외면한 것이다.

살아남은 네 명은 등반을 계속하는 것이 존 할린을 위한 길이라 믿고 반드시 등정에 성공해 ‘존 할린 직등 루트’라 명명하기로 약속한다.
이들은 60시간이나 굶주린 상태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들이 아이거 정상에 오르던 날, 존 할린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아이거 등반대로부터 그의 장례식에 보내진 헌화에는 ‘굿바이 존(Goodbye John)!’이라는 짧은 글귀가 이들이 못다 한 절절한 고별사를 대신했다.

 

 

2. 아이거 북벽 최초 등정으로 알려진 등반가이자 작가인 하인리히 하러에 대해

 

산사람들에게 하인리히 하러는 ‘전설 속의 영웅’이다. 전설의 무대는 물론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아이거(3.970m) 북벽이고, 전설의 기록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가 남긴 책 ‘하얀 거미’이다.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업적은 물론 아이거 북벽 최초 등반(1938)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명예에 대한 속 깊은 이해는 전후맥락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하인리히 하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 지리학과 재학 시절 국가대표 스키선수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을 만큼 뛰어난 스포츠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대학 졸업 직후 아이거 북벽에 매달린 이유는 의외로 엉뚱했다. “나는 낭가파르바트(8,126m) 원정대원으로 선발되고 싶었다. 무명의 청년이 그런 국가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아이거 북벽 초등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 원정대가 등반에 집념을 불태운 산이 에베레스트라면, 독일 원정대는 낭가파르바트를 정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독일은 그때까지 4차에 걸쳐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무려 31명의 목숨을 잃었을 뿐 등정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하러는 자신이 품었던 야심 그대로 5차 원정대원에 선발되어 낭가파르바트로 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쯤에서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비약한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인도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하인리히 하러는 4번의 시도 끝에 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21개월 동안 변변한 장비도 없이,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개척해 가며 걸어서 히말라야를 넘었다. 그가 초인적인 대장정 끝에 도착한 나라가 바로 티베트다. 그리고 그가 당시 소년이었던 달라이 라마와 함께 보낸 신비한 세월을 기록한 책이 ‘티베트에서의 7년’이다.

1953년에 출간된 ‘티베트에서의 7년’은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르게 하면서 동시에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하인리히 하러는 그 열풍이 가라앉기 전에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를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아이거 북벽 최초 등반의 기록인 ‘하얀 거미’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 책은 ‘티베트에서의 7년’ 출간 이후 5년, 그리고 실제 등반 이후로는 무려 20년 만인 1958년에 출간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평가절하된 산악인이 바로 안데를 헤크마이어(1905~?)이다. 실제 아이거 북벽 최초 등반의 1등 공신은 당시 뮌헨파의 대표주자로서 ‘12발 아이젠의 달인’이라 불리우던 이 사내였다. 그는 하인리히 하러가 ‘하얀 거미’를 출간하기 9년 전인 1949년 자신의 저서 ‘알프스의 3대 북벽’을 통해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프스의 3대 북벽’을 읽지 않고 ‘하얀 거미’를 읽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이거 북벽의 최초 등반자는 안데를 헤크마이어가 아니라 하인리히 하러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베스트셀러의 위력이다. 어떤 면에서는 하인리히 하러는 산악인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더욱 성공한 인물이라 평해야 옳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하러는 이 두 권의 책으로 남은 생애를 풍족하게 지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며 2006년 1월7일 고국 오스트리아의 한 소도시에서 향년 94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97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브래드 피트를 캐스팅하여 ‘티베트에서의 7년’을 영화화할 때 하인리히 하러의 명예는 급전직하한다. 오랫동안 쉬쉬하며 숨겨왔던 그의 나치 부역 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력지 ‘슈테른’에 따르면 하인리히 하러는 아이거 북벽 등정 당시 나치 친위대(SS) 소속이었으며, 아이거 북벽 정상에서도 나치 깃발을 흔들려 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히틀러와 함께 찍은 사진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한 합리화’의 도구로 폭 넓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 여기저기서 짜깁기--